연차를 박박 긁어모아 떠난 휴가에서 프랑스 남부 지방의 몽티냑(Montinac)이란 곳에 갔다. 첫날부터 이어진 강행군에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멘탈이 털리다 못해 반쯤 나간 상태에서 따라갔던 그 동네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벽화라고 알려진 '라스코(Lascaux) 동굴 벽화'가 있었다.
전여친 현마누라님께서 그 당시 "이곳에 꽤 유명한 동굴 벽화가 있는데 가볼래?"라고 할 때에도 이게 바로 책에서 봤던 그것일 줄은 전혀 예상 못했었다.
'피곤해 죽겠는데 가긴 또 어딜가노~ 고마 집에 가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아 진짜? 재밌겠네~ 가보자!! 😂 "라고 쫄래쫄래 따라나서게 되면서 필자와 구석기시대 벽화와의 만남은 이루어졌다.
라스코 동굴 벽화
라스코 동굴 벽화라고 하면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다들 아래 그림을 보면 '아 저거~ 그 그~!' 하지 싶다. 본인이 그랬다는 말이다. 요즘도 교과서에 계속 나오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라떼에는 있었다.
그렇다. 라스코 동굴 벽화는 우리가 수업시간에 배운 원시인들이 그렸다던 그 벽화다. 지금으로부터 약 2만년 전, 쉽게 상상이 안될 정도로 오래 전이며, 석기시대 중에서도 더 오래되었다는 구석기시대에 그려진 동굴 벽화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라스코 동굴의 발견
라스코 동굴(Lascaux Caves)은 프랑스 남서쪽 몽티냑(Montinac)이라는 동네에 소재하고 있는데, 1940년 마을 소년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뒤, 1979년에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동굴 안에서 발견된 기원전17,000년~15,000년 경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동굴 벽화는'레 트루아 프레르(Les Trois-Freres)', '니오(Niaux)', '알타미라(Altamira)', '퐁 드 곰(Font-de-Gaume)', '레 콩바렐에스파냐'의 동굴보다도 훨씬 크고, 벽화의 보존 상태도 뛰어나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한 지 12년이 지난 1960년부터 곰팡이가 기생하고 석회 암벽에도 하얀 얼룩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라스코 동굴은 1963년에 동굴 벽화의 일반 공개를 금지했다.
그 후로 정부 기관의 추천장이 있는 전문가에 한해 하루 6명 이내로 동굴 벽화의 관람이 허용되었으며, 일반 관람객을 위해 동굴이 발견된 바로 옆에 라스코 동굴과 똑같이 모방한 동굴을 만들어 공개하고 있다.
라스코 동굴 벽화 관람 후기
구석기시대 동굴이 있는 곳치곤 굉장히 현대적으로 보이는 건물에 들어섰는데, 안내 직원에게 예매한 표를 보여주고 입장했다. 투어는 개인 투어와 그룹 투어가 있는데 개인 투어가 쪼금 더 비싸다.
열댓 명 정도의 사람들이 한 그룹이 되어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모니터와 헤드셋을 받아 들고 동굴로 입장했는데, 아쉽게도 한국어 지원은 없다. (어이 대사관 일 좀 하라고!!)
관람을 했던 동굴은 실제 라스코 동굴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공간이지만, '이게 가짜라고? 진짜 아냐?'라고 느껴질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설명에 따르면 동굴 안에는 약 6000여 점의 크고 작은 동물이 그려져 있는데, 동물들의 묘사는 굉장히 디테일했고, 적색 철광, 황색 철광 그리고 흑 망간을 이용해 칠한 동물들의 색감도 뛰어났다.
또 어떤 벽화는 사다리가 없이는 닿을 수 없는 굉장히 높은 곳에 위치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동굴 천장에 그려진 것도 있었다.
구석기시대 원시인이라고 하면 맨날 "우가!! 우가~!!"만 하고 힘만 세고 멍청한 느낌이었는데, 알고 봤더니 완전 아티스트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원시인 아티스트 선생님'이라 칭호를 바꾸기로 한다.
이분들이 그린 벽화에는 수사슴, 들소, 고양이과 동물, 곰, 새 심지어 코뿔소도 있는데, 이곳 벽화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말'이라고 했다.
유독 '말 그림'이 많기도 한데, 어떤 말은 짧은 다리와 통통한 몸통을 가진 친숙하고 애정 어린 느낌으로 묘사 한 반면, 어떤 말들은 초원을 가로지는 야생마들의 거침없음을 그대로 표현해놓은 것도 있다.
그럼 당시 선생님들은 왜 이렇게 '말'을 많이 그렸을까? 실제로 말이 사육되기 시작한 것은 벽화를 그린 시기로부터 훨씬 이후이므로, 당시 원시인 선생님들이 초원을 빠른 속도로 가로지르는 야생말들에 대한 승부욕, 소장욕, 경외와 애정을 드러낸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당시 기술로는 엄청난 힘과 속도를 자랑하는 야생말들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 생각하니 그분들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동굴 투어가 끝나고 입장하게 된 곳에서는 이번 벽화에서 본 그림들의 의미와 동물 개체수가 의미하는 것 등 지금까지 벽화를 해석한 자료들을 전시해두고 있었는데, 투어 당시 대부분의 설명을 일부러(?) 흘려들은 본 블로거는 이곳에서 그나마 원시인 화가 선생님들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VR 체험관도 있어서, 고글과 헤드셋을 끼고 다시 한번 동굴 탐험을 할 수 있게 해 뒀는데, 하도 이리저리 헤드뱅이를 하다 보니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금방 내려놓긴 했지만, 그래도 충실해 보이려고 준비를 많이 한 듯했다. 전시와 체험공간이 허접하진 않았단 얘기다.
처음엔 돈을 내고 가짜를 보러 왔다는 생각에 김이 조금 빠졌던 것도 사실이지만, 완벽하게 옮겨 놓은 기원전 17,000년 전 벽화의 디테일함과 원시인 아티스트 선생님들의 스토리에 아쉬움보다는 흥미로움이 많았던 시간이었다.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라스코 동굴 2(Lascaux II)였는데 지금은 라스코 동굴 4(Lascaux IV)도 개방되어 방문이 가능하다고 한다. 자세한 정보 및 티켓 예매는 아래의 Lacaux.fr 공식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되겠다.